[정진명의 우리 어원 나들이] 빛 1
[정진명의 우리 어원 나들이] 빛 1
정진명 시인, 우리말 어원 고찰 연재 ‘17-빛 1’
  • 정진명 시인
  • 승인 2024.06.06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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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이미지. 사진=픽사베이/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빛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어서, 그 겨레의 인식이나 생각을 아주 잘 드러내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말의 뿌리를 연구하는 분들도 거의 다 한 번씩은 이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장이나 이론이 크게 다르지도 않아서 굳이 다시 다루어야 하나,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학자들의 이론을 시시콜콜 소개하는 것보다는, 저의 개똥철학을 얘기하는 것이 어쩌면 좀 더 색다른 것이 될지 몰라서, 제 생각을 중심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먼저, ‘빛’이란 말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빛을 인식하기 가장 좋은 때는 언제일까요? 우리가 대낮에 빛을 알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너무 밝아서 빛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해를 바라본다면 쉽겠지요. 하지만 해가 보내는 빛을 눈으로 알아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사람도 무언가 인지를 해야 거기에 이름씨를 붙이겠지요. 우리 겨레는 하루 중 언제 빛을 제대로 인식하는가 하는 일상의 경험을 묻는 것입니다.

하루 중에서 빛의 존재가 또렷이 드러내는 때가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밤과 낮이 뒤바뀔 때입니다. 또는 가려진 해가 갑자기 드러날 때입니다. 해가 뜨고 해가 질 때, 빛이 산의 능선 위로 처음 떠 오를 때 우리는 빛을 또렷이 봅니다. 산 뒤에 서린 어둠을 가르고 빛이 수평에서 점차 비스듬히 땅으로 내리꽂힐 때 우리는 빛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이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또는 터진 구름 사이로 햇빛이 내리비칠 때 마치 빨대처럼 꽂힌 빛의 존재를 인지하죠.

우리의 눈에 빛이 보일 때는 어둠과 밝음 사이의 어떤 경계입니다. 그 경계에서는 반드시 빛이 기울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기운 채로 밝게 빛나는 빛에 ‘빛’이라는 이름을 안 붙인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 같습니다. 비스듬히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비탈’의 ‘빝’이나, ‘햇빛’의 ‘빛’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만의 어원설입니다. 하하하.

‘비탈’의 ‘빝’과 ‘햇볕’의 ‘볕’은 끝소리인 받침까지 똑같습니다. 이러니 이걸 굳이 다른 뜻이라고 고집부릴 이유가 없죠. 눈에 보이는 대로 보는 겁니다. ‘비치다, 빗기다, 비스듬하다’처럼 옆으로 기운 것들은 모두 ‘빗’으로 기록됩니다. 머리를 빗는 ‘빗질’도, 그 도구인 ‘빗’도 모두 비스듬히 빗기는 것으로 모양으로 보면 똑같습니다.

옛말에서는 ‘빌, 별, 벌, 벼로, 비로’로 표기됩니다. 전국에 수없이 많이 흩어진 높은 봉우리 중에 ‘비로봉’이라고 붙은 이름은 모두 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쓰는 ‘별(星)’도 여기서 온 말입니다. 제천 봉양에 ‘벼루박달’(硯朴)이라고 있는데, 이게 선비들이 쓰던 벼루이기보다는 ‘별’의 음차일 가능성이 큽니다. 벼루의 역사는 2,000년인데, 땅이름은 그보다 훨씬 더 먼저 시작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읍으로 시작되는 모든 땅이름은, 빛과 연관 지어 풀어보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가야의 지배층이 쓰던 드라비다말로 빛은 ‘veṭṭa’이고 ‘날이 새다’는 ‘vettai’이어서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빛깔’을 보겠습니다. ‘깔’은 ‘갈’이고, 옛 모습은 ‘ᄀᆞᄅᆞ’입니다. 갈래라는 뜻입니다. 왜 이 ‘갈’이 붙었느냐면, 빛은 여러 가지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즉 프리즘을 통과한 빛은 서양에서는 일곱 빛깔로 갈라지고, 동양에서는 다섯 빛깔로 갈라집니다. 빨주노초파남보. 청황적백흑. 이렇게 한 가지에서 여럿으로 갈라지니, ‘갈’이 붙은 것이고, 그래서 빛깔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동양에 사니, 빛깔을 모두 다섯으로 인식했습니다. 이 5색으로 가기 전에 묘한 말 한 가지를 더 보고 가겠습니다. ‘때깔’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때+깔’의 짜임이죠. 때깔은 과일처럼 빛이 무르익은 것을 말합니다. 잘 익은 과일을 보고 “때깔 좋다!”고 말하는데, 왜 ‘때’일까요?

과일은 그것이 익는 철이 있습니다. 그 시간이 이르러야 비로소 색깔이 또렷해집니다. 과일의 색깔을 보고서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때가 되어 또렷해진 빛깔을 ‘때깔’이라고 한 것입니다. ‘제 때의 빛깔’의 준말일 텐데, ‘깔’이 그것을 함축하고 있죠. 그래서 ‘깔’은 우리말에서 단순히 ‘갈래’라는 뜻에 그치지 않고 어떤 모습을 나타내는 말로 쓰입니다. 그것을 한자로는 ‘태(態)’라고 적었습니다.

춘향가에 보면 이몽룡이 춘향이네 집을 찾아가서 춘향을 살펴보는데,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저리 돌아라. 뒤태를 보자.’고 합니다. 앞태 뒤태가 바로 과일에서 말하는 때깔을 말하는 겁니다. 이걸 ‘태도’라고 옮기면 정말 우리말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죠. 한자로 ‘態’라고 적는다고 해서 그게 태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때의 제대로 된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깔의 ‘때’에는 시간만 있는 게 아닙니다. 더러운 것을 가리키는 ‘때’도 함께 있습니다. 과일은 바탕색이 있습니다. 참외 같은 경우는 노랗죠. 그런데 참외가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를 보는 것은, 그 바탕색이 아닙니다. 바탕색 위에 제대로 익는 노랑이 다시 떠오릅니다. 바탕의 노랑은 좀 허연 편입니다. 허연 노랑에 진노랑이 뜹니다. 이게 바로 ‘때’입니다. ‘때 탄다’고 할 때의 그 ‘때’입니다. 때는 바탕에 ‘띠’로 구별 지어진 곳을 말합니다. 바탕과는 다르기에 안 좋게 불려서 우리는 지금 때를 더러운 것으로 이해하죠. 원래는 그렇지 않습니다.

묘한 것은 이 ‘때깔’의 ‘때’에 시간과 공간 두 관념이 동시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시공이 하나임을 인식한 것입니다. 참외 껍질에 서리는 빛깔을 보고서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말은 이처럼 시간과 공간이 똑같은 말로 표현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어느결에’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은 같은 것이 겹친 것 사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이테 같은 것을 보면 결을 볼 수 있죠. 이렇게 공간을 나타내는 말인데, 시간을 나타내는 말로도 쓰입니다.

이런 인식은 정말로 독특한 것입니다. 우리 겨레에게는 시공을 구별하지 않는 사고가 있습니다. 죽어서 가는 곳은 차원이 다른 곳일 텐데 그냥 ‘저승’입니다. ‘이승’의 연장이죠. 죽음과 삶이 나뉘지 않고, 시간과 공간이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사람들과 얘기할 때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잘 못 알아듣습니다. 이게 참 어려운 모양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친구와 약속을 정할 때 이렇게 말하죠.

“지금 육거리 시장 입구로 와. 30분 후에 보자.”

그러면 그 말을 알아듣습니다. 이 사람은 왜 30분 후에 보자고 했을까요? 자신이 지금 있는 곳에서 육거리 시장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30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30분 후라는 시간을 말했지만, 그 30분은 공간을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입니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런 우리의 일상 체험을 송두리째 뒤흔든 과학이론이 아인슈타인의 쌍둥이 이론입니다. 쌍둥이가 빛의 속도에 가깝게 달리면, 두 쌍둥이는 서로 다르게 늙는다는 것이죠. 공간과 시간이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얘기입니다. 중력에 따라 시간과 공간은 늘어지기도 하고 부러지기도 한다는 설명입니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의 이 이론은 빛이 달의 옆을 지날 때 달의중력 때문에 휘어진다는 관측으로 이어짐으로써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이런 사실은 시간과 공간이 서로 나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고, 결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시간과 공간은 한 덩어리라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결국 3차원 공간에 시간이라는 또 다른 차원이 더해져, 현실은 4차원이 되고, 이 4차원은 같은 공간을 다시는 똑같이 체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담긴 공간 자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디론가 흘러가는 중입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까닭이 이것입니다. 시간의 비가역성은 시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간과 결부된 문제라서 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겪기는 힘듭니다. 우리는 여전히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뉴턴의 시간과 공간에서 사는 중입니다. 그래서 공간과 시간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엮였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매우 힘듭니다. 그래서 이런 사실이 철학에서도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어 시간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주제는 오래도록 다루어졌습니다.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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